어머니가 점심 먹으라고 부르십니다. 집에는 어머니와 저, 그리고 한낮에도 열심히 울어대고 있는 수많은 곤충들과 텃밭에서 쉬지않고 자라고 있는 채소들, 그리고 못먹는 풀들 뿐입니다. 하루종일 깔깔 엉엉 꾸엑꾸엑 소음을 만드는 어린 조카는 밖에 놀러 나갔구요. 고즈넉한 한낮입니다.

열무물김치, 콩나물무무침, 작년 김장김치에 녹두죽이 전부인 식탁은 소박하지만 정갈하고 맛있습니다. 매 끼니 이렇게 건강하고 정성이 느껴지는 밥상을 대할 때마다 새삼 어머니께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일이십년 후, 더이상 어머니의 밥상을 마주하지 못하게 되는 날이오면, 끼니때마다 서러워질 게 분명해요.

구수한 녹두죽을 먹다가 문득 고개를 듭니다. 텃밭에는 먹지는 못하지만 이쁘다고 어머니께서 심어놓으신 국화들과 시퍼런 배추가 열심히 자라고 있고, 그 너머로 녹음이 한창인 야트막한 언덕이 보입니다. 순간 사위가 조용해졌고 전 감동하고 말았습니다. 이 조용한 가운데에도 셀수없이 많은 존재들이 자신의 생명력을 뿜어내고 있다는 사실이 문득 절절히 느껴졌거든요.

저 언덕을 눈이 시리도록 퍼렇게 덮고 있는 나무와 풀들, 또 그 사이사이마다 깃들어 있을 벌레들, 전깃줄에 앉있는 잠자리들, 처마밑에 거미줄을 치고 먹이가 걸려들길 숨죽여 기다리는 거미들, 땅속에서 꿈틀대고 있을 지렁이들, 열심히 배춧잎을 갉아먹고 있는 달팽이들, ... 그 수많은 존재들이 지금 내 눈앞에서 살아가고 번식하고 또 죽어간다는 사실에, 그 압도적인 개체수와 그들이 펼치는 필사적인 생존의 투쟁에 저는 압도당하고 말았습니다. 나 하나의 삶과 죽음같은 건 이 거대한 생명의 역사 앞에선 정말 아무것도 아니구나, 그런 생각이 깨달음처럼 떠올랐습니다.

이 모든 것이 여름내 눈앞에서 펼쳐진 장면인데 전 왜 이제서야 감동하게 되었을까요? 아마도 최근 제 감각의 입력을 제한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시험이 몇달 남지 않은 시점이 되고 보니 마음을 다잡아야겠다는 생각에, 웹서핑도, 신문도, 뉴스도, 영화도, 음악도 안 보고 안 듣고 있는 요즘이거든요. 의외로 금단증세도 없고, 오히려 이 평온과 무색무취의 나날들에 만족해 하고 있습니다. 정치고 문학이고 예술이고 연예고, 뭐가 그리 궁금했을까, 이상하다고 느껴질 정도에요.

대신 미처 감각하지 못했던 것들이 눈앞에서 펼쳐졌습니다. 조카녀석을 품에 안고 골목길을 따라 걷노라면, 수만번을 걸어본 길이지만 매번 새로운 것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어제 낮엔 닫혀있던 나팔꽃이 오늘 아침엔 활짝 피어있고, 저기 땅 위에 거무튀튀한 건 어제 조카가 밟아 뭉갠 떨어진 감이고, 호랑나비는 이름모를 꽃위에 앉아있고... 한해의 시기시기마다 자연이 만들어내는 놀라운 변화들이 이제서야 눈에 띄게 된 것입니다.


이런 삶이 만족스럽습니다.


텃밭에서 배추가 자라고 있습니다. 손바닥만했던 것들이 지금은 제법 배추다운 크기와 모양을 띄게 되었습니다. 그 몇달간의 성장을 지켜봐온 저로서는, 저 배추가 김치가 되어 밥상에 올라오면 고맙고 미안하고 행복한, 그런 복잡한 기분이 될 것 같습니다. 하물며 소나 돼지나 닭 같은 좀더 고등한 동물, 인간과 다를바 없는 통증을 느끼고 인간 못지 않은 생존의 욕구를 가진 존재를 먹는다는 것은 얼마나 야만적이고 잔인한 처사인가요? 아직도 가끔이나마 육식을 하는 자신이 부끄럽게 느껴집니다.





텃밭에서 자라고 있는 배추들. 달팽이가 갉아먹은 흔적이 여기저기.



어머니께서 매달아 놓은 바람개비. 바람불면 뱅글뱅글.



마당 풍경과 처마 밑 거미. 누나네 식구들은 가족이 잔뜩이라 언제나 빨래가 한보따리입니다. 거미는 대따 큽니다. 10cm는 족히 넘는. 하도 벌레를 쳐먹어서 배가 통통.






'4' 댓글

흠..

2008.09.22
11:45:12
신선처럼사는구나
오빠가...스님처럼 살면 왠지 맞을거같다......라고..우리 언제 말한적 있었던거 같은데...

Cocteau

2008.09.22
18:09:00
그러게... 신선처럼 스님처럼 살고있네... 딱히 그렇게 살고 싶은 건 아닌데 일단 돈이 없기 때문에... 돈도 있는데 신선처럼 스님처럼 살면 그거야말로 멋진 거겠지...
근데 스님처럼 살기에는 뭔가 원하는 게 많아서 곤란할 거 같아요.

밥먹구와서..

2008.09.22
13:54:57
암튼...오빠는 금세기 보기 드문 보석같은 멋진 사람이라는거 꼭.. 잊지말고...
그런줄알고사셔요....
( 나의근황 : 1.외사촌동생이랑 한달전부터 함께살아요..작은방 내주고 월세받고 2. 보이차 (자사호구매 / 알고보니 돈 엄청깨지는취미임. 그러나 스타벅스,커피빈 안마시고 산다는 생각으로.. 비싼 보이차는 묵힐수록 더 비싸진다니깐...내가 좋아하는 골동품처럼.) 마시기 시작했어요 사무실에서.... 3. 침대 모기장 안전존 빼고
앉아있는 곳곳에 모기쉐끼들에게 헌혈을 하루 평균 3번이상 해주고있음 . 도대체 왜 나만인줄 모르겠음. 사촌동생은 한방도 안물림 4. 삼독더위 여름부터 뜨개질해서 목도리 하나 다 떠가는데...푸하하하 ( 완전 삐뚤빼뚤,) 안쪽팔리면...... 오빠........할래???

Cocteau

2008.09.22
18:09:20
아... 누가 볼까 두렵군요... 결국 세를 주셨군요. 잘 하셨어요. 그 방 놀려둬면 뭐해. 한푼이라도 보태야지. 모기, 잘 때만 안 물리면 되죠 뭐. 수동집도 모기가 엄청 많아서 막 걸어다녀도 와서 물어. 날이 더 선선해지면 모기들도 한풀 꺾이겠지요. 목도리는... 쪽팔릴 일이 뭐가 있겠어요. 고마울 뿐이죠. 아, 뜨게질은 또 언제 배우셨대? 뜨개질도 한다는 걸 알면 남들이 놀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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