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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눈에 띄어 책꽂이에 꽂혀있던 책을 펼쳐보았습니다. 십몇년전에 읽었던 책인데 책장을 넘기다 밑줄이 쳐져있는 부분을 발견했어요. 1888년 미국의 에드워드 벨라미가 쓴 <뒤돌아보며-2000년에 1887년을 본다>라는 소설의 내용을 소개하고 있는 부분이었습니다. 1887년에 보스턴에 사는 웨스트라는 사람이 잠자리에 깨어나보니 사회주의화된 2000년의 보스턴에 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다음은 웨스트와 신세계 주민과의 대화입니다.

"능력이 똑같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텐데 어떻게 해서 그런 일이 가능한지 알고 싶습니다."

"그것만큼 간단한 일도 없지요. 우리는 각자에게 똑같은 노력을 하도록 요구합니다. 다시 말해 그의 능력으로 제공할 수 있는 최선의 봉사를 요구하는 겁니다."

"그들의 최선을 다한다고 해도 사람에 따라서 생산물의 양은 2배씩 차이가 났는데요."

" 바로 그렇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인 생산물의 양은 보수 문제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보수는 윤리의 문제이고 생산물은 물질적인 양입니다. ... 최선을 다하는 사람은 모두 같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노동의 성과에 대한 평등한 몫이 보장되어야 합니다.)

"내 생각으로는, 말이나 산양의 경우에는 그들의 능력에 합당한 고정된 작업량이 요구되지만 인간에게는 그 능력에 따라서 보수를 주는 것은, 동물은 이성적인 존재가 아니어서 자연히 최선을 다하지만 인간은 그 생산물의 양에 따라 보수를 줌으로써 비로소 최선을 다하도록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본성은 결핍을 두려워하거나 사치를 좋아하는 것 이외의 동기에 의해서는 움직이지 않는다, 다시 말해 생활의 안정과 평등은 사람들에게 노력할 마음이 나게 하지 않는다고 정말로 생각하는 겁니까? ... 최고급의 노력, 절대적인 자기헌신이 문제로 된다면 전혀 별개의 동기부여가 필요하지요. 더 높은 임금이 아니라, 명예라든가, 사람들의 감사를 받고 싶은 마음이라든가, 애국심이라든가, 의무감이라든가가 국가를 위한 죽음이라는 문제에 직면한 병사 앞에 놓인 동기였습니다. 세계사의 어떤 시대에나 이러한 동기가 인간에게 가장 훌륭하고 가장 고귀한 것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제게 사회주의는 '인간에 대한 믿음'을 의미했습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경쟁과 서로에 대한 착취 대신 평등과 공존을 추구하는 존재라는 믿음, 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 결국 개인의 행복에 연결된다는 사실을 학습을 통해 체득할 수 있을만큼 합리적인 존재라는 믿음. 저 책을 읽을 당시에는 아직 신자유주의니 세계화니 하는 용어들이 일상적으로 통용되지 않았지만, 인간에 대한 믿음에 기초한 거대한 정치실험이 결국 실패로 끝났다는 사실은 제게 다가올 시대에 대한 막연한 불안을 갖게 만들었습니다. 더많은 소유를 향한 무자비한 경쟁으로 치닫는 정글같은 세상. 결국 세상은 제 예감보다 더 끔찍한 곳이 되어 버렸구요.

제가 저 굵은글씨 부분을 읽는 순간 울컥해진 건, 김지운의 <달콤한 인생> 마지막 내레이션의 동자승과 같은 안타까움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달콤한 꿈을 꾸다 깨어났지만 그것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라는 걸 알기에 눈물 흘리는 안타까움. 저의 경우엔 상실감까지 보태졌어요. 단순한 꿈이 아니라 어쩌면 실제로 그런 세상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막연하게나마 가졌으니까요. 그리고 십수년간 그 달콤한 꿈이 내평개쳐지고 짓밟히는 걸 걸 지켜보았습니다. 문득 정신차리고 보니, 이따위로 변해 버린 세상을 탓하며 슬퍼하던 저 자신도 어느새 짓밟고 있는 무리 중 하나가 되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세상이 변했다는 건 결국 사람이 변했다는 의미 아닐까요? 저처럼 달콤한 꿈을 마음 한 켠에 갖고 있었을 사람들이 어느새 남을 짓밟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는 악다구니를 퍼부으며 몸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는 핑계를 대면서. 사실은 자신들이 변했기 때문이라는 걸 애써 무시하면서. 가령 국가를 더 많은 이익의 창출을 목표로 하는 회사처럼 파악하고 '사장님(CEO)'처럼 운영하겠다는 선거 구호가 먹히는 세상이 되었지요. 정주영은 실패했지만 세상이 변한 덕분에 이명박과 홍정욱은 성공했습니다. 그들을 뽑은 건 바로 꿈을 내팽개친 사람들이구요. 그런 사람들이 아주 많았진 거에요.

더욱 암담한 건, 그나마 희망을 걸어볼 수 있는 어린 사람들이 자본주의 이외의 경제체제를 꿈꾸는 건 더욱 어려워졌다는 점입니다. 우리사회에서 공산주의라는 단어는 조중동 이외의 매체에선 거의 들을 수 없게 되었고, 긍정적인 가치를 부여하는 경우는 더욱 드물어 졌으며, 척박하고 천박한 학문풍토는 강단에서 정치경제학 강의까지 내몰고 있습니다. 게다가 어릴적부터 더 좋은 대학과 사회적 성공이라는 꿈을 주입받으며 남을 짓밟고 올라서는 훈련을 쌓아온 그들에겐 하다못해 <교실 이데아>같은 노래를 불러주는 가수도 없어요.

이 낙서를 끄적이다보면 제 자신에게 뭔가 희망적인 결론을 내릴 수 있을거라는 바램을 가졌는데, 글렀군요. 더욱 암울해질 뿐이군요. 올림픽 금메달에서나 삶의 희망을 찾는 얼빠진 인간들이나 그런 세상에 불만을 쏟아낼 뿐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 저 자신이나 한심하긴 마찬가지. 이딴 나라와 문명은 그냥 망해버리는 게 도와주는 거고 실제로 망해버릴 날도 멀지 않았다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결론은 하나, 정관수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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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11
01:2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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